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평일 07:30~08:30)
- 진행: 이동재 매일신문 객원편집위원
- 대담: 2019년 7월 말 중부 전선에서 임진강을 통해 귀순한 북한 군인 출신 A씨
방송에서 실명을 밝히긴 했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여 A씨로 표기합니다.
▷이동재 객원편집위원(이하 이동재): 최근에 현역 북한군 하사가 귀순을 했습니다. MDL을 직접 넘어서 강원 고성군으로 귀순했습니다. 현역 북한군이 귀순 의사를 밝히고 귀순을 한 게 5년 만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뉴스를 찾아보다 그 5년 전의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최근의 귀순 북한군. 그 5년 전에 귀순한 현역 북한군이었던 분을 모셨습니다. 정말 어렵게 모셨는데요. 안녕하십니까?
▶A씨: 네. 안녕하세요. 제가 본론 이야기하다 보면 북한 사투리가 많이 나올 겁니다.
▷이동재: 좋습니다.
▶A씨: "안녕하세요"만 한국 말입니다.
▷이동재: 더 좋습니다. 현지 발음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북한 어디 출신이세요?
▶A씨: 고향 강원도 철원쯤 되고요.
▷이동재: 강원도예요?
▶A씨: 제가 (군에서) 있었던 곳은 저기 함경도 지역 북청, 덕성, 함흥 이쪽에 다 있었습니다.
▷이동재: 뉴스를 보니까 북한군 복무 중 정확히 2019년에 귀순을 하신 것 같은데. 2019년 언제 귀순하셨는지 그다음에 북한군에서는 또 어떤 직무를 맡으셨었는지 그런 걸 여쭤보고 싶습니다.
▶A씨: 네. 2019년 8월에 귀순을 했고요. 북한에서는 운전병을 했었어요.
▷이동재: 운전병이요? 어떤 차량 혹시 모셨어요?
▶A씨: 때로는 트럭 같은 거 있잖아요. 전투차. 그거 보직하고 있다가 오기 전에 그거 하고 있다가 왔습니다.
▷이동재: 우리로 치면 두돈반 같은 거 그런 거?
▶A씨: 5돈짜리.
▷이동재: 운전병을 맡으셨고. 북한군 계급에서는 어떤 계급이었나요?
▶A씨: 계급은 중사로 있다 왔습니다.
▷이동재: 중사는 우리나라로 쳐도 중사인가요?
▶A씨: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중사가 간부 정도 이렇게 분류를 하지만 북한에서는 중사면 병사, 사병 이렇게 보겠습니다.
▷이동재: 그때 귀순하셨을 때 그때 기사가 속보로 한 100개 정도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분이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시에 어떤 지역에서 복무를 하셨던 거예요? 당시에 귀순 직전에 복무를 하셨던 곳은?
▶A씨: 함경남도 덕성이요.
▷이동재: 거기서부터 탈북하는 과정 이것도 엄청난 또 드라마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좀 이따 여쭤보도록 하고 그러면 왜 탈북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신 건지 언제 처음 탈북 생각을 하신 건지 그거 먼저 여쭤볼게요.
▶A씨: 네. 그게 아마 오늘의 주제에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 같아요. 왜 탈북하느냐 하는게. 탈북이라는 게 어느 순간에 하나의 계기점이 폭발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는 절대 아닙니다. 계속 누적되다가 누적되다가 어느 순간에 그게 불꽃이 탁 튕기면 그다음에 나오는 거죠. 그런데 저도 그와 상당히 비슷했고요.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세뇌 교육은 많이 받았지만 세뇌가 좀 저는 좀 되지 않는 그런 타입이었습니다.
▷김새봄 칼럼니스트(이하 김새봄): 성격 자체가요?
▶A씨: 제가 전단지를 본 적이 있거든요.
▷이동재: 삐라요?
▶A씨: 삐라를 봤는데 그때 삐라 내용을 100% 믿지는 않았지만 그 삐라 내용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동재: 어떤 내용이던가요.
▶A씨: 예를 들어서 6.25 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이런 내용도 있고 남북한의 경제 격차는 어느 정도인가 이런 내용도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 내용을 보면요. 북한은 대한민국의 10분의 1도 안 된다 하는 내용으로 쭉 있어요. 근데 경제 지표가 북한을 과대평가했더라고요.
▷이동재: 그것만도 못하다?
▶A씨: 네. 예를 들어서 한국은 1인당 1천 달러를 쓴다면 북한은 100달러 정도밖에 못 쓴다. 이렇게 돼 있는데 북한은 100달러가 아니라 제가 보니까 30달러도 제가 못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 대한민국에서 남조선에서 우리를 과대평가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이게 신빙성이 있겠구나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게 아니로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동재: 그럼 그 삐라라는 걸 몇 살 때 그럼 처음 보신 거예요?
▶A씨: 아마 15살쯤 됐을 거에요.
▷이동재: 탈북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탈북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점차적으로 누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시에 함경남도 함흥보다 약간 남쪽에 있던 덕성 이란 지역이었는데 그쪽에서 탈북을 하시게 된 그 과정에 대해서 좀 저희가 여쭤볼게요. 그러면 이번에 고성 도보 귀순도 그렇고, 그다음에 귀순 과정에서 철조망이나 지뢰를 만날 수도 있고, 검문을 받을 수도 있고 하는데 '혹시나 잘못돼도 상관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신 건지 그다음에 그 탈북 과정에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A씨: '죽어도 상관없다' 이런 거는 좀 아닌 것 같아요.
▷이동재: 그건 아니고.
▶A씨: 살고자 발버둥 치는 건데. 그런데 죽음을 좀 맞받아 간다 하는 건 의미죠. 사실 북한에서는 자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거든요. 자살을 하면 그것 역시도 당과 수령의 베푸는 은덕을 싫다 이런 사회주의 제도가 싫다 이렇게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대로 죽기도 어려운 상황이니까 이왕 죽을 거면 가다가 죽자 이런 뱃심인 거죠.
▷이동재: 뱃심이라는 게 배짱이다 그런 거죠. 그런 식으로 하셨고 그럼 군 생활 도중에 그래도 트리거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순간, 진짜 탈북하자 이런 순간이 있었을 것 같은데 몇 달 동안 준비를 하신 건지, 아니면 갑자기 이제 안 되겠다 탈북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신 건지.
▶A씨: 몇 달이 아니고 한 몇 년을 제가 준비했어요.
▷이동재: 몇 년을 준비를 하셨어요?
▶A씨: 3년을 제가 탈북을 준비했고요. 그 과정에서 어떻게 넘어갈까를 상당히 많이 고민을 했죠. 그리고 탈북을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때 또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잘못 생각해서 오판을 할 수가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진짜 이게 확실한 건지 3년 동안을 지켜본 거죠. 제 결심이 확실한 건지 한 번 나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북한이잖아요. 누구나 한 번 고향을 나오면 그렇죠. 다시 한번 한 번쯤은 가보고 싶거든요. 근데 북한만은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중하게 결심을 해서 한 3년 동안 고민을 하다가 마지막에 결론을 내려서 DMZ로 루트를 선택하고 이쪽으로 왔습니다.
▷이동재: 그러면 예행연습 같은 거 머릿속으로 했을 거 아니에요? 어디에 뭐가 있고 어디에 뭐가 있고 이제 지형 지물을 다 파악을 하고 지도 같은 것도 파악을 했을 것이고 어떤식으로.
▶A씨: 우리 대한민국의 지도를 한반도 지도를 보면 북한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줄기가 몇 개 있어요. 그쪽으로 강을 따라 쭉 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고 그리고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냥 다 외우고 있는 거예요. 어디로 가면 강이 나오고 얼마 더 가면 철책이 있고 이거를 외우고 있다가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리다가 그 다음에 출발을 했던 거죠.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군대라는 거는 한 번 딱 벗어나면 금방 추적을 하거든요.
▷이동재: 탈영이잖아요. 탈영이니까.
▶A씨: 그래서 상당히 고민스러웠어요. 어떻게 나를 따라오지 않게끔 하고 도망갈까.
▷이동재: 그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A씨: 근데 그런 방법이 있더라고요. 제가 제 머리로 생각한 건 아니에요. 우연히 탈북을 결심했을 때 책을 제가 쭉 보는데 손자병법과 36계라는. 근데 그 책에 힌트들이 여러 개 있더라고요. 어떻게 적으로부터 벗어나는지 이런 내용들이 쭉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 석 달 동안 저를 찾지 않게끔 만들어놓고 왔습니다. 어떻게 근데 북한 사회는 사실 돈이면 다 되거든요. 최종적이면 돈이면 돈으로 다 찾지 않게끔 다 해놓고 그렇게 하고 떠났죠.
▷이동재: 그러면 함경남도 덕성이라는 곳으로부터 DMZ까지 와 가지고 우리나라로 귀순을 하기까지의 그 여정은 얼마나 걸렸던 거예요?
▶A씨: 7일 정도 걸렸어요.
▷이동재: 7일 정도 안 쉬고 계속 걸어가지고?
▶A씨: 아니요. 아니요. 저기 날짜를 기다리느라고 제가 생각했던 날짜를 기다리느라고. 조금 더 DMZ 근처에 와서 있었죠.
▷이동재: 생각했던 날짜라는 거는 뭐 달이 밝은 날?
▶A씨: 비가 많이 오는 날. 비가 많이 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그날 넘으려고 했었던 거죠. 북한에서 DMZ까지 오는 데는 하루도 안 걸렸어요.
▷이동재: 멀지가 않네요. 생각보다
▶A씨: 그게 그래서 북한도 지금 돈만 내면 어디든지 차가 다 다니거든요. 돈 내고, 차 타고, 저기 DMZ 근처까지 와서 한 40km 그쯤에서 부터는 걸었죠.
▷이동재: 그럼 비 오는 날까지는 어디서 대기하셨던 거예요?
▶A씨: 비 오는 날 돈만 주면 다 숨어 있을 데가 있습니다. 민가도 있고. 잘 데도 있고. 밥도 주고.
▷이동재: 북한이야말로 또 자본주의가 꽃을 이렇게 피우고 있어요. 하하.
▶A씨: 북한은 진짜 리얼한 자본주의입니다.
▷이동재: 생존형의 자본주의 진짜.
▶A씨: 돈 벌면 세금을 안 내요. 북한은. 그리고 복지를 안 하죠.
▷이동재: 돈으로 어떻게 어떻게 해가지고 DMZ까지 왔다. 임진강 그쪽까지 왔는데 임진강 어디 쪽을 넘으신 거예요? 보니까 중부 전선이라고 기사에는 나와 있었는데 임진강 어느 쪽으로 오셔서 하신 건지.
▶A씨: 임진강 상류에 도착을 해서 임진강 건너서 그리고 우리 군에 보면 태풍 전망대라고 있거든요. 그쪽으로 제가 왔어요.
▷이동재: 거기가 그럼 강폭이 좀 좁은가요?
▶A씨: 사실 강 폭이 좁고 넓고는 상관없어요. 제가 헤엄을 상당히 잘하거든요.
▷김새봄: 그래서 비 많이 올 때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강물이 불기를 기다리면서요.
▶A씨: 제가 이런 걸 하려고 또 탈북을 하려고 북한에서 지금 시간 날 때 저수지에 가서 저수지에 가서 제가 물에 얼마나 떠 있을지도 지금 테스트를 해봤어요. 그래서 테스트를 해보는데 제가 한 3시간 정도를 그냥 물에 부력 기지 없이 떠 있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정도면 3시간이면 저런 웬만한 강을 건너 갈 때는 다 그냥 상관없겠구나 이렇게 했었죠.
▷이동재: 그럼 당시에 그러면은 임진강을 건넌 후에 DMZ에 우리 쪽 구간으로 오게 돼서 그럼 우리 쪽 병사한테 어떤 식으로 신호를 보내신 건지.
▶A씨: 신호를 안 보냈는데 저를 봤어요.
▷이동재: 근무 열심히 했네요. 우리 병사가.
▶A씨: 북한군은 제가 넘어가는지 안 넘어가는지도 모르거든요. 비가 오니까 볼 수가 없거든요. 어둡고 하니까. 근데 철책 쭉 한 500m 그 정도까지 접근을 했는데 불빛이 저한테 쫙 쏟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를 보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았죠. 그래서 손을 흔들었어요. 손을 흔드니까 잠깐 있다가 방송으로 안내하더라고요. 귀순 할 의사가 있는가. 남쪽으로 내려오라. 그래서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데 그 철책에 문이 있거든요. 문 있는 방향으로 유도를 합니다. 오른쪽으로 와라, 왼쪽으로 와라. 이렇게.
▷이동재: 지뢰는 없었던 거예요.
▶A씨: 강이여서 그래서 앞으로 쭉 가면서 갈밭을 지금 뚫고 가는데. 갈밭을 헤쳐서 한 500m 정도 갔거든요. 철책 문까지. 근데 그게 좀 상당히 그때 상당히 좀 힘들었어요. 와서 좀 딱 저를 잡아갔으면 좋겠는데.
▷김새봄: 체력이 떨어졌는데.
▶A씨: 네. 그러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우리 국군의 절차니까 강제 납. 이게 되니까. 데려온 걸로 돼 잖아요. 그래서 자발적인 의사로 해서 당신이 여기까지 온 거다 이렇게 하는 거죠.
▷이동재: 저희 댓글 보니까 어떤 분이 28사단 태풍전망대에 근무를 하셨었대요.
▶A씨: 아. 그래요. 하하.
▷이동재: 그리고 위 북쪽에 사이로 댐이 있다 이렇게 말하세요.
▶A씨: 그 댐을 제가 한 500m 전부터 헤엄을 쳐서 댐으로 제가 떨어져가지고. 그 댐이 몇 m인지는 모르겠어요. 한 20m 그 정도면 될 거예요. 높이가 그 정도 낙차고에서 떨어져서 그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산기슭으로 붙어서 올라온 거죠.
▷김새봄: 위험하네요. 다이빙을 하신 거잖아요.
▶A씨: 다이빙이 아니고 떨어졌죠.
▷이동재: 우리나라에 귀순을 하신 거잖아요. 말씀하실 수 있는 부분까지 말씀해 주세요. 이게 좀 민감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처음 어떤 공간에 들어가서 이제 여러 가지 조사 절차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딱 그때 들었던 느낌, 어떤 공간에 가서. 먹을 것을 거기서 줬을 수도 있고. 그다음에 분위기나 환경 같은 게 어땠는지. 그때 들었던 느낌 같은 것도요.
▶A씨: 첫 느낌은 군인들 만났을 때 첫 느낌이죠. 철책 앞에까지 딱 갔는데 문이 열리더니 군인들이 한 10여 명이 뛰어나오더라고요. 총을 딱 들고 저를 쫙 감싸더라고요.
▷이동재: 군사 기밀에 해당될 수 있는 부분은 제거를 하고 말씀을 해 주시고요.
▶A씨: 예. 그래서 가니까 군인들이 진짜 딱 감싸는데 무서웠죠. 솔직히. 누가 방아쇠를 당기리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될 지가 모르잖아요.
▷이동재: 내 인생.
▶A씨: 무서웠죠. 그랬는데 또 남자니까 또 이렇게 내가 무서운 티를 낼 수는 없죠. 주머니에서 또 선글라스를 딱 썼습니다.
▷김새봄: 오늘도 가져오셨잖아요.
▶A씨: 그때 탈북하기 전에 제가 준비해 가지고 온 거 썼는데 아마 다른 분들 저 새끼 저거 뭐 하는 거지 했을 거예요. 아니 근데 멋을 부리려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그냥 사진 찍어서 언론에다 그냥 뿌리는 줄 알았어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는 줄 알고 얼굴을 가리려고 했었죠.
▷이동재: 그때 몇 살이셨던 거예요.
▶A씨: 그때 24살.
▷이동재: 우리 나이로?
▶A씨: 우리 나이로 25살. 그래서 그다음에 안으로 지금 실내로 저를 딱 결박해서 안내를 했거든요. 근데 묶을 때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내 집에 내 집에 내 발로 찾아왔는데 왜 묻습니까? 이렇게 반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분들이 이거는 절차니까 따라줘야 됩니다. 그래서 아무 소리 못하고 딱 묶여서 들어갔죠. 들어갔는데 군대 병영에 들어갔는데 아주 화려하더라고요.
▷이동재: 화려해요?
▶A씨: 네. 아주 깨끗하고 그래요. 북한군하고는 좀.
▷김새봄: 그럼 그런 행색도 조금 많이 대비되지 않으셨어요?
▶A씨: 피지컬이 엄청 큰 거예요.
▷이동재: 병사들의 체구가.
▶A씨: 대한민국 군인들이 평균 10cm가 크니까요. 거기에 좀 압도당하더라고요.
▷김새봄: 그게 바로 느껴지셨어요.
▶A씨: 네.
▷이동재: 그러셨구나. 알겠습니다. 정말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영화 일부를 딱 본 것 같은데 일단 그런 식으로 오셨고 그러면은 첫 식사는 기억나세요?
▶A씨: 저 식사는 아마 어디 구내식당 식단을 먹은 것 같아요. 아마 그 조사기관의 구내 식단을 먹었는데 나름 맛있어요.
▷김새봄: 메뉴가 뭐였어요?
▷이동재: 가자미 한 마리에다가 김치찌개 거기다가 그다음에 무슨 뭐 이거 조그만 거 있잖아요.
▷이동재: 군데리아?
▶A씨: 소시지 같은 거. 거기다가 밥, 김칫국 이렇게 해주더라고요.
▷이동재: 알겠습니다. 근데 당시에 좀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2019년에 당시 귀순을 하셨어요. 8월에 귀순을 하셨는데 그때 보도가 한 100건 정도 있었는데 후속 보도가 없었어요. 신기하게도 후속 보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2019년에는 조금 뭐랄까요? 남북 관계를 정부에서 강조를 많이 했었잖아요. 그런 것 때문인지 그 후에도 활동을 잘 활발하게 안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활동을 혹시 자제하라는 얘기 같은 게 있었는지 싶어서요.
▶A씨: 제가 일단 뉴스를 하나도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었어요.
▷이동재: 그러셨어요.
▶A씨: 예. 저 자체도 또 활동을 좀 안 했었죠. 북한에 있는 가족들도 좀 생각을 해서 안 했었죠. 그런데 제가 계속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지금부터는 활동을 시작하면서 제가 어떤 무대를 통해서 제 가족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 제가 이 자리에 온 것도 있거든요. 제가 오늘 최초로 얼굴을 지금 보였거든요.
▷이동재: 감사합니다.
▶A씨: 근데 제가 이렇게 활동을 하면서 북한에 요구할 건 요구해야 어떻게 보면 저희 가족이 그래도 좀 그대로 안전하게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좀 있었습니다.
▷김새봄: 근데 같은 해인 2019년 11월에 탈북 선원이 북송됐던 시기이기도 하거든요. 그거를 보고서는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A씨: 그때 제가 국정원을 딱 마치고 하나원이란 데를 가 있었거든요. 근데 좀 많이 좀 두근두근 떨렸었어요. 근데 나도 저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제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는데 저도 하마터면 판문점으로 갈 뻔했어요. 저에게 보내겠다는 그런 뉘앙스 이야기도 여러 번 했었어요. 그래서 저게 저렇게 강제로 넘어갈 수도 있겠구나. 그때 제가 판문점으로 넘기겠다, 이런 멘트를 들었을 때 넘길려면 날 죽여서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저게 중국을 통해서 가겠다 중국을 통해서 몰래 가겠다 이렇게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 경위에 대해서는 제가 구체적으로 밝히기 어려워요.
▷이동재: 네. 그렇죠. 그러면 이게 귀순 루트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이제 중국을 통해서 많이 예전에 했었고 지금은 좀 어려운 것 같은데 중국을 통해서도 했었고, 그다음에 우리 선생님께서는 또 군 복무 중에 또 걸어서 내려왔는데 중국을 통해서 하는 것보다 직접 걸어오는 그런 방법을 택한 이유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A씨: 일단 중국 국경 쪽에 제가 아는 선이 없어요. 그리고 중국을 갔다고 해도 중어가 되지 않아서 누구하고 소통이 안 돼요. 그래서 처음에는 바다로 가려고 생각을 했어요. 바다로 헤엄쳐서 스쿠버 다이빙 할 때 입는 슈트 입고, 헤엄쳐서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슈트를 북한에서 구할 수가 없더라고요.
▷김새봄: 근데 어떻게 그 슈트에 대해서는 알고 계셨어요.
▶A씨: 이게 물 속에 오래 있으면 사람이 죽어요. 저체온증이라는 것도 걸리고. 그리고 몰래 이렇게 어두운 데 이렇게 가리고 하게 되면 피부도 좀 가리고. 그 수영에 좀 유리하거든요. 그런 게 그래서 그런 산소통도 거기에 또 달려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걸 좀 사려고 했는데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 DMZ로 그러면 간다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린 거죠.
▷김새봄: 근데 지난 정부 당시에. 이제 문재인 정부 때죠. 한국은 남북 평화를 강조했거든요. 근데 북한군에서 근무할 때 당시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이동재: 실제로 그런 부분이 좀 있었는지. 북한도 좀 전향적이었는지.
▶A씨: 제가 저는 군에 있었고 저희 형, 형이 있거든요. 형은 사회에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탈북을 하려고 이렇게 했을 때 형하고 통화랑 이렇게 했을 때 형이 그랬어요. 탈북하겠다고 하니까 난 무조건 남조선 간다고 하니까 형이 그러더라고 저를 못 가게 설득을 하는 거죠. "지금 남북 관계가 이렇게 좋은데 너 새끼 무슨 미친 개수작을 터냐, 아니 장군님께서 원수님께서 문재인도 만나고 미국 대통령도 말이야 원수님 만나러 지금 우리 땅에 다 찾아오고 하는데 네가 무슨 오판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냐 조금만 참아라 우리가 잘 살 거다" 이렇게 설득을 하는 거예요. 근데 같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치가 다르니까 형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근데 저는 북한 군에 있다 보니까 북한 군에서는 남북 관계가 이렇게 딱 따뜻해 보일 것처럼 이렇게 쇼를 할 때 국내에서는 그런 걸 다 배제시키고 '무조건 남북 관계는 무력 통일이다. 남조선은 무력으로 깔고 앉아야 된다' 이런 교육을 계속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사회에서 뭘 하든 어떻게 하든 저거 쇼를 하고 있구나 이걸 알고 있죠.
▷김새봄: 이미 알고.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거나 아니면 덜해졌다거나 이런 차이는 못느끼셨어요.
▶A씨: 네. 원래 예전부터 해온 거죠.
▷이동재: 변화는 없었다. 그럼 지난 정부 당시에 또 탈북 루트가 많이 막혔다라는 게 탈북민들의 또 여러 가지 증언인데 실제로 좀 탈북이 어려워졌었습니까? 지난 정부 당시에?
▶A씨: 지난 정부 뭐 이렇게 복송을 시켰잖아요. 그런 거 보면 탈북을 하려고 하다가도 할 수가 없는 거죠. 내가 넘어가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구나. 그런 두려움에 용기조차 나지 않는 거죠.
▷이동재: 실제로 탈북하다가 붙잡혀서 돌아가게 되면은 그러면은 사살을 당한다거나 그런 게 있나요.
▶A씨: 제 보기에는 제가 좀 극단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사살을 당하는 게 나아요. 살아도 살아있는 삶이 아닌 거는 저는 차라리 죽는 일만 못하다고 봐요. 정치범 수용소 같은 데 끌려가면 그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고 그냥 노예거든요. 노예인데 거기서 또 살아 뭐해요? 그냥 천국이 있다면 천국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김새봄: 그러면 이게 저희 항상 궁금한 건데 귀순하고 처음으로 인터넷에 어떤 걸 검색하셨을까요.
▶A씨: 인터넷을 접했을 때 김 씨에 대해 검색했죠.
▷이동재: 이거 백이면 백이라니까요.
▶A씨: 근데 저는 김일성 일가가 이렇게 탁월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님은 제가 위에서 알고 왔어요. 전단지를 통해서 제가. 김정일 와이프가 몇 명 있고 이런 걸 봤기 때문에 그걸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서 대체 다른 사람들은 북한의 김씨 세습 체계를 어떻게 보는지 이런 게 궁금해서 자꾸 찾아봤었죠.
▷이동재: 제가 오늘 보도를 보니까 이제 이번에 귀순하신 북한군 하사가 초소에 적발될 때마다 탈영병을 잡으러 왔다 이렇게 둘러댔다는 그런 보도가 있었어요. 근데 쫓아오는 북한군이 없었다고 그래서 '기강 행위가 있는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보도가 나왔어요. 완전히 사실인지는 나중에 직접 그분이 입으로 들어봐야겠지만요. 그다음에 북한의 열악한 상황이나 한국 문화에 대한 동경 이런 내용들도 좀 있었고. 그다음에 소속 부대가 해체가 됐는데 '재력이나 인맥이 있으면 좋은 곳으로 발령난다' 이런 얘기도 있었어요. 진짜 북한 군대 분위기가 요즘 그렇습니까? 진짜 재력이나 인맥이 있으면 좋은 곳으로 가고요?
▶A씨: 네 북한은 사회에도 빈부 격차가 심한데 군대는 더 심해요. 군대가 권력이 있고 재력이 있는 집의 자녀들은 진짜 잘 먹고 잘 사는 데로 가요. 거기는 쌀밥을 먹어요.
▷이동재: 쌀밥.
▶A씨: 제가 그런 데도 꽤, 한동안 있었거든요. 운이 좋아서 거기 갔는데 대부분이 다 좀 신분이 좀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집에 돈도 좀 있고 권력있고 그럼 여기서 쌀밥 먹어요. 근데 제 스스로가 그 곳에서 버티고 있기가 힘들어요. 눈치 보여서.
▷김새봄: 눈치를 어떻게 주나요?
▶A씨: 끼리끼리 노는데 거기 들어 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애들은 생활을 진짜 개떡같이 해도. 개떡같이 군대 (생활을 해도) 군관학교라든가 좀 이렇게 발전(승진)이 좀 빨리 돼요.
▷김새봄: 아, 승진을 빨리 한다고요?
▶A씨: 승진을 그냥, 쭉쭉 올라가요.
▷이동재: 저 평소에 진짜 궁금했던 게 북한군 생활이 10년이라고 하던데 진짜 10년이에요? 이거 어떻게 버텨요?
▶A씨: 전 13년이에요. (처음에) 저는 10년으로 알고 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군 복무를 쭉 하고 있는데 운전병은 3년 더 하래요.
▷이동재: "운전병은 편하니까 3년 더 하라우." 뭐 이런 거예요?
▶A씨: 그렇죠. 편해서 3년 더 하라기보다 북한에서는 운전병이 기술 보직으로 분류가 되거든요.
▷김새봄: 아 기술직이라서요
▶A씨: '기술직이니까 너네는 전역시키기가 아까워, 조금 더 해.' 이런 거죠.
▷김새봄: 그거는 중간에 들으신 거에요 아니면 처음부터 들으신거에요?
▶A씨: 중간에요
▷김새봄: 그때 심정은 어떠셨어요?
▶A씨: 5년 정도 했을 때 제가 탈북을 해야 되겠다고 이렇게 막 생각을 하고 있을 때거든요. 근데 3년을 더 하라는 거예요. 사실 저는 군 복무 10년을 마치고 오려고 했어요. 한국에. 군적에서 없어지면 계속 따라다니고. 그리고 군대에서는 도망가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근데 3년을 더 하라고 해서 탈북이 앞당겨진 거예요.
▷김새봄: 그 마음가짐은 다 비슷할 것 같아요. 진짜로.
▶A씨: 그렇죠.
▷이동재: 군대 오래 있는 거는.
▷김새봄: 10년은 정말 까마득 했을것 같아요. 그것도 절반도 안있었는데 갑자기 3년을 더 해 이렇게 하니까 와.
▶A씨: 제가 아직 북한에 있으면 아직 군인이거든요. 아직 군인이고. 제가 지금 이렇게 먹지 못해서 좀 이렇게 (야위어) 있고
▷이동재: 지금은 풍채가 좋으신데
▶A씨: 북한에서 그렇게 있겠지만 지금은 한국에 와가지고 제가 올 때도.
▷김새봄: 살 빼야 되죠.
▶A씨: 네 지금 살 뺄 걱정도 하고 운전하고 다니거든요. 제가 타는 차가 사단장 차보다 더 좋거든요. 제가 타는 차가 38선을 하나 넘었는데 갑자기 사단장 정도의 그런 생활을 하는 겁니다 지금.
▷김새봄: 이거 많은 분들이, 위에서 또 보셔야 될 텐데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동재: 그러면 북한군의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고 들었는데 보통 계셨던 부대에서 부대 내 의식주는 어떤 수준이에요?
▶A씨: 네 의식주가 말씀드린 것처럼 부대마다 천지차별이에요. 천양지차죠. 누구는 쌀밥을 먹고 누구는 제대로 그 새끼를 챙겨줄 수 없는 그런 부대들이 있어요. 감자 몇 알로 한 끼를 떼우고 그러거든요. 감자가 이렇게 주먹 머리만한 것도 아니에요. 이게 탁구공만한 거 몇알로. 그렇게 격차가 심해요. 그래서 일괄적으로 어떻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어렵거든요. 근데 북한에서 과반수가, 90%의 군인들이 1년에서 2년 사이에 영양실조를 무조건 거쳐야만이 생존할 수가 있어요. 그 시기를 모살이 기간이라고 하거든요. 나무를 이렇게 딱 다른 데다 떠다 옮겨 심으면 사는 기간 있잖아요. 그것처럼 다른 데 옮겨 심으면 사람도 모살이를 한다. 그래서 모살이 기간이라고 하거든요. 그때 버티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거죠.
▷이동재: 그러면 휴전선 인근 최전방 부대 같은 경우에는 이번에 내려오시는 분은 그쪽에서 오지 않았나 싶은데.
▶A씨: 거기서 안 온 것 같아요. 제가 이제 좀 전에 뉴스를 봤는데 그게 진짜라면 '탈영병 잡으러 다닌다' 이렇게 말한 게 있다고 했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왔거든요. 군대가 군인처럼 생긴 사람이 타지역에 와서 돌아다니면 무조건 경무부나 이런 데서 잡혀서 다른 데 부대로 복귀시키거든요. 그래서 그게 '내가 만약에 잡히면 어떻게 변명을 하지?' 생각했을 때 탈영병 잡으러 간다고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만약 부대가 DMZ 쪽에 있었다면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돼요. 근데 위에 다른 멀리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런 걸 생각을 해야 돼요.
▷이동재: 일단 그래도 함경도에 계셨는데, 예전에 가까운 데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북한 부대나 근무 중에 확성기 방송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A씨: 확성기 방송은 들어본 적 없어요.
▷이동재: 가까이서 근무하신 적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확성기 방송을 만약에 듣는다면 지금 다시 이제 현역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과거 이제 13년을 살아야 되는 그런 (상황이라면) 군대에 있어야 되는 군인의 마음으로 돌아와서, 확성기 방송을 딱 듣는다고 가정하면 어떤 생각이 드실 것 같으세요?
▶A씨: 진짜 좀 짜증 날 것 같아요.
▷이동재: 짜증 난다.
▶A씨: 근데 짜증이 좀 의미가 좀 다른 여러 가지죠. '왜 북한군에서 이렇게 있어야하지?' 그런 짜증.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하지?' 하는 그런 짜증. 저기 대한민국에 좀 가고 싶은데 갈 수 없는 그런 자기 처지에 대한 그런 안타까움도 있을 거고요. 아마 북한 DMZ 지키고 있는 사람들 80~90%가 집에 가족이나 뭐라든가 이런 게 없다면 그냥 다 넘어와요.
▷김새봄: 다 가족 때문에.
▶A씨: 다 볼모 잡혀가지고 못 넘어오는 거죠. 그런 결단을 진짜 한번 차가운 결단, 이성을 가지고 한번 결단을 한 사람들이 DMZ를 넘어오는거죠.
▷이동재: 생각해 보니까 댓글에 "그때는 이제 확성기 방송이 끊겼었던 시기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만약에 방송을 듣는다면, 그러니까 걸그룹 같은 노래 뉴진스, 아이브 이런 노래를 들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있잖아요. 한국에 오셔서 아이돌 노래 듣고 나서. 군대에서 그런 노래 들으시면 어떠실 것 같아요?
▶A씨: 사람마다 성향은, 듣는 거는 다 다르겠죠? 솔직히 저는 아직 아이돌을 잘 몰라요. 근데 지난번에 대북 방송할 때 장윤정 씨의 올래 올래 하는 그런 노래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게 딱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김새봄: 어떤점이요.
▷이동재: 갈래갈래지 뭐.
▶A씨: 올래올래 하는 단어 단어에 그런 노래가 있는데 그게 북한 군인들이 들으면 진짜 멘탈이 깨질 것 같아요. 단어가, 장윤정 씨가 노래하는 거는 대부분 또 가사가 클리어하게 들리거든요.
▷김새봄: 발음도 좋고.
▷이동재: 그렇죠. 딕선이 좋아요.
▶A씨: 딕션이 좋아요. 근데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는 영어도 섞여 있고 그래서 좀 잘 안 들릴 수도 있어요 가사가.
▷이동재: 앞으로 이제 선곡표에는 장윤정 씨 노래가 쫙 깔리는 것으로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또 이런 걸 알아가네요. 그러면 또 최근 뉴스에 지뢰를 DMZ 인근에서 매설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사망했다 이런 기사도 있었더라고요. 이런 거 보시면 좀 어떤 생각 드세요?
▶A씨: 늘상 있는거에요. 지뢰 매설하다 죽었냐 아니면 집 짓다 죽었냐 차이지 죽는 게 비일비재하거든요.
▷이동재: 방송에서 '지옥 같은 노예의 삶에서 탈출하라' 이런 부분도 나왔다고 하던데.
▶A씨: 그런 멘트를 이렇게 들을 때 그 사람들은, 저라면 진짜 막 진짜 멘탈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이동재: 참을 수가 없다.
▶A씨: 그 삶이 지옥이니까
▷이동재: 삶이 지옥이다.
▶A씨: 그냥 군복무 10년을 하는데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이렇게 사는데 그게 지옥이 아니면 뭐겠어요?
▷김새봄: 팩트를 딱 정확하게 정곡을 찌르니까 더 그럴 것 같습니다.
▶A씨: 어찌 보면 악질. 악질이라기보다, 아주 진짜 충성분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 심리를 흔들지?' 이런 생각도 하고 적개심도 좀 불타겠죠. 그런데 과반수의 군인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김새봄: 그럼 이번 귀순 사건을 두고서는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A씨: '참 힘든 결심을 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분도 한 번 저처럼 아마 DMZ를 넘어올 때는 가족이라든가 모든 고민거리가 엄청 컸을 텐데. 자기가 넘어온 이후에 가족은 어떻게 될지 걱정하고 이런 게 컸을 텐데 그 모든 걸 용기를 가지고 넘어왔다는 것에 좀. 한국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네요.
▷이동재: 선배로서 정말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을 또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리고 이 말씀 여쭤보기 좀 죄송스럽긴 한데 가족 생각도 많이 나시죠?
▶A씨: 가족 생각 많이 나죠. 특히 명절날에 많이 나요.
▷이동재: 명절날에.
▶A씨: 그런데 사실 가족하고 헤어진 지는 너무 오래됐어요. 제가 북한에서 떠나오기 전에 가족이 진짜. 가족 때문에 많이 고민을 했거든요. 제가 가족만 아니면 군 복무 시작하고선 그냥 넘어갔을 거예요. 근데 북한에서는 제가 10년, 13년 있어도 가족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어요.
▷이동재: 그러면 어떻게 해요? 군 생활하는 동안 휴가도 없어요?
▶A씨: 같은 땅에서 살고 있을 뿐이지 가족을 볼 수가 없어요. 근데 그게 뭐 의미가 없잖아요. 차라리 한국에 와서 돈을 벌든 어떻게 하든 그래서 그 북한의 전체적인 시스템을 좀 개선시키거나 여기서 돈을 보내주거나 뭐 이런 방법이 오히려 더 나은 거죠.
▷김새봄: 현실적으로요.
▶A씨: 네, 현실적인 거죠. 북한군 90% 정도가 집에다 돈을 달라고 하거든요. 힘들어요. 집도 돈이 없는데 본인들은 더 힘들거든요 월급이 없으니까. 근데 군인이 돈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배고파서 막 진짜 못 견딜 때 돈이 필요해서 집에다 돈을 달라고 요구를 해요. 월급은 없으니까, 집에다 돈 달라고 해서 군 복무를 하다 보니 부모님들이 더 힘들어요 제 역할을 못하면. 그래서 그렇게 짐이 될 바에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좀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그냥 한국에 와서 돈을 보내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김새봄: 그러면 이제 먼저 남으로 넘어온 선배로서, 만약 대북 확성기로 본인 육성을 들려줄 수 있다면 어떤 말씀을 좀 하고 싶으세요?
▷이동재: 지금 여기서 방송 한번 해 주세요.
▷김새봄: 네, 볼 수도 있어요.
▶A씨: 이제 지금 듣는 시청자들은 군인들이 아니어가지고 그런데, (만약 방송을 한다면) 북한 군인들에게 공감이 갈 만한 그런 이야기를 할 거죠. 정말 어린 나이에 성장 발육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거든요 17세, 18세 이때면. 그때 군대에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거기서 자기의 자아는 무시당하고 일방적으로 북한 김 씨 일가에서 세뇌 교육을 하는걸 들으면서 본인이 없이 그냥 김씨만을 위해서 사는 (삶인) 거잖아요. 본인의 삶에 대해서도 한 번쯤 좀 생각해 봐라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고.
▷이동재: 본인의 삶에 대해.
▶A씨: 그리고 이번에 그 <탈주>라는 영화 있잖아요. 그 <탈주>에서 이제훈 배우가 막 도망칠 때 보위부원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총을 탁 대면서 "남조선이라고 다 지상 낙원일 줄 알아?"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때 이제훈 배우가 그런 말을 해요. "내가 남조선에 실패하러 간다. 이 땅에서는 실패조차 할 수 없어서 나는 실패하러 간다." 이런 멘트에 갑자기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줄줄줄 나오는 거예요.
▷김새봄: 와 저도 지금 눈물이 날 것 같아요.
▶A씨: 북한에서는 실패도 할 수가 없어요. 실패도 물론 물론 실패한 삶이지만 그냥 노동당에서 여기 가서 일해 하면 거기 가서 실패하는 거죠. 자기가 스스로 선택을 해서 실패하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아요. 선택의 기회가 대한민국에는 있다. 당신들이 뭘 원하든 여기 와서는 최소한 백수를 할 수 있다 하는 걸 제가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동재: 충격적인 게 자아 얘기를 하셨고 그다음에 실패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이 말씀에 정신이 확 듭니다.
▷김새봄: 저도요.
▶A씨: 노동신문을 제가 북한에서 볼 때, 노동신문은 저는 믿지 않거든요. 노동당 입맛에 쓴 거기 때문에. 근데 신문 제일 뒤에 국제 소식이 조금씩 실려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산불이 났다', '남조선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데모를 했다' 이런 내용이 실리거든요. 근데 거기에 어느 날 이런 주제가 실린 거예요. '남조선에는 청년 실업자가 20만 명이 넘었다' 이런 내용이 딱 실린 거예요. 근데 그걸 보면서 저는 희망이 보이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실업을 할 수가 없거든요. 돈을 안 줘도 무조건 일 해야 되거든요. 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갈 때는 이게 좀 긍정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그래서 '실업이 있다' 이런 의미는 북한에서 봤을 때는 자유가 있다는 표현이거든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래서 제가 북한에서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도 '저게 남조선 가면 최소한 나를 강제로 잡아다. 일 시킬 사람은 없겠구나' 그리고 '산에 가서 내가 도토리를 주워 먹든 밥을 주워 먹든 내 삶을 내가 살 수 있겠구나' 그런 희망을 봤어요 제가.
▷이동재: 제가 처음에는 재밌게 시작을 했지만 나중에 들어보고 나니까 정말 자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그런 뜻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우리는) 백수의 자유가 있잖아요, 실패할 자유가 있고. 그래서 그 모습이 정말 저는 충격적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탈주>라는 영화 말씀을 하셨으니까, <탈주>에 보면 지뢰 매설 위치를 기억한 후에 탈북을 시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실제로 그렇게 지뢰의 위치를 파악을 해가지고 탈북하는 것도 실현 가능하다고 보세요?
▶A씨: 사실 저는 그게 실행 가능하다고 보지는 않아요. 하도 영화니까 영화적 가미를 좀 하느라고 그런 내용을 넣었겠지만 북한 군인들도 DMZ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걸로 제가 알고 있어요. 제가 DMZ에 복무하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 군인들이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그 4km 전방을 어떻게 다 볼 수가 있겠어요? 불가능한 거죠.
▷이동재: 보시기에 김정은 체제가 앞으로 오래 갈 것 같으세요? 요즘 엘리트 탈북도 이어지고 있고 이래저래 탈북민이 대한민국에 지금 공식적으로만 3만 명이 넘는 실정인데요.
▶A씨: 그렇죠. 지금 밖에서 본 변화는 북한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보통 이야기할 때 엘리트 탈북 이런 표현을 하는데 저는 그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 대한민국에 엘리트가 온 사례는 많지 않아요. 황장엽쯤 되면 엘리트라고 하겠죠.
▷이동재: 그렇죠 예
▶A씨: 북한의 외교관, 어디 기껏해서 대사나 공사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은 그냥 공무원이에요. 엘리트가 아니에요. 북한 정치의 0.1%도 그 사람들이 바꿀 수가 없어요. 그건 엘리트가 아니죠. 그리고 북한에서 그렇게 많이 왔다고 해도 북한 사회가 결코 쉽게 변하지 않아요. 우리가 여기 한국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면 절대. 북한 주민들이 생각이 바뀌는 것만큼 통제하는 그 수위가 엄청 올라가거든요. 우리가 여기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자유라는게 뭔지 알게끔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서 알려주고 그러면 변화하겠죠. 계속해서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라도 북한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게 가장 큰 빠른 변화라고 생각을 해요.
▷이동재: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조금이라도 계몽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그게 가장 북한을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오늘 저희가 모시기 잘한 것 같아요. 어렵게 모셨는데
▶A씨: 지금부터는 숨어만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동재: 숨어만 살지 않고 선택의 자유가 있잖아요. 대한민국에는. 열심히 활동을 하시면 북한에서도 많이 보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5년 전에 현역 군인 신분으로 북한군에서 탈북을 하신 A 선생님과 지금까지 함께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좀 나와주시고요. 마지막으로 시청자 여러분께 짤막하게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 각오 한 말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씨: 사실 북한에서 처음 넘어와서 한국사회를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때 한국에서 북한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국적을 회복시켜주고,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기회를 준 거에 너무 감사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현재 제가 공부를 마치면 그에 버금가게 좀 떳떳하게, 통일 후에 저기 북한의 김씨 정권이랑 (북한 사람들이) 봤을 때 '저 새끼 남조선으로 도망가서 아주 막 살았구나' 하지 않게끔, 북한 사람들이 봤을 때도 제가 '남조선으로 도망가더니 헛살지 않았구나' 할 정도로 살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기자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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